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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용 예술의 한 종류인 '패션'에 관하여

by 헌찬 2024. 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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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은 실용 예술의 한 종류이다.

 

패션(Fashion)은 특정한 시기에 유행하는 복장이나 두발의 일정한 형식을 일컫는 말이다. ‘옷맵시’, ‘유행’, '풍조', '양식' 등과 비슷한 말이라고 볼 수 있다. 사람마다 보는 관점도 가지각색에 유행이란 게 흔히 그렇듯 세월 따라 변하기 마련이라 유행하는 패션은 돌고 돈다.

의류를 제작할 때 고려할 점이 많은 바지보다 허리에 두르기만 하면 되는 치마의 등장이 인류사에서 먼저였다.

바지의 형태는 주로 승마를 많이 하는 유목민에게 전파가 이루어졌다. 이를테면 중국에는 바지가 도입된 계기가 조무령왕의 이른바 "호복기사(胡服騎射)" 즉 "북방 이민족처럼 바지를 입고 말을 타며 활을 쏜다."라는 사자성어의 사례를 통해 전해 내려오며, 인도의 경우도 중앙아시아에서 기원한 쿠샨 왕조에 의해 승마에 적합한 바지 및 단추 달린 외투가 도입되었다.

이러한 사례는 유럽에서도 다르지 않아서 스키타이 유목민들이 입던 바지가 켈트족에게로 전파된 것을 계기로 유럽 사회에도 점차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고대 로마인들은 공화정 시기까지는 켈트인들이 바지를 입는다고 상당히 이상하게 여겼다고 한다. 카이사르의 갈리아 원정 이후 원로원에서 "이제 바지를 입은 원로원 의원이 나오는 거 아닌가?"하는 농담이 나올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고대 말 전쟁 수행 능력의 중심이 보병에서 기병으로 이동한 것은 물론 바지를 입는 풍습이 있던 게르만족들이 서로마 제국 쇠퇴와 멸망을 계기로 유럽 각지에 정착하면서, 치마를 대신하여 오늘날 유럽의 일상적인 복장이 되었다.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후에도 토가를 입는 로마 원로원의 권위는 어느 정도 남아있기는 했지만, 그나마도 중세 초 완전히 몰락하고 대신 유럽에서 봉건 기사들이 소 영주로 장원을 다스리는 봉건제가 자리 잡으면서 바지가 더 빠른 속도로 보편화되었다. 물론 여기에는 종교적인 이유도 있는데, 고대 유럽이 기독교화하기 이전에는 남성의 나체 노출에 대해서 금기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바지 대신 무릎까지 내려오는 치마를 입고 말을 타거나 의자에 앉는다고 해서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진 않았지만, 신체 노출의 보다 엄격한 기독교가 퍼지게 되면서 게르만족의 대량 이주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동로마 제국 등에서도 아래에 바지를 먼저 입고 위에 전통적인 로마식 튜닉을 입는 식으로 복장이 변화하게 된다. 다만 바지의 기원 때문에 바지가 용감한 남성이 입는다는 고정관념은 바지가 본래 기마민족의 복장이었다는 사실이 일반적으로 잊힌 오늘날에도 어느 정도 남아있다.

바지와 치마의 차이 외에도 남성은 단발 여성은 장발을 기르는 문화가 보편화된 것 역시 전쟁 때문이었다. 시민군이 중심이 되었던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는 머리를 길게 기른 상태에서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쓰면 전투 중 땀이 눈으로 들어가는데, 창과 방패를 든 상태에서 땀을 훔치기도 쉽지 않은 노릇이고 이를 계기로 서구 남성의 보편적인 헤어스타일은 단발로 고정되기 시작했다. 중앙아시아를 중심으로 한 튀르크인 등등의 변발 역시 전투 과정에서 편의를 위해 고안된 헤어스타일이다. 다만 고대 그리스-로마인들이 완전히 머리를 변발처럼 자르지 않은 이유는 햇빛이 강한 지중해 기후상 머리를 밀고 투구를 쓰면 두피에꼭 화상을 입었기 때문이다. 자연히 고대 그리스-로마의 헤어스타일은 당시 투구 디자인에 맞추어 이마부터 목 윗부분까지 덮고 그 아래까지는 깎는 형식으로 발전하였다.

고대 로마 남성들이 입던 튜닉은 오늘날 중동의 전통 의상 카미수랑 상당히 흡사한 편으로 긴 티셔츠에 허리띠를 조르는 형식에 가까웠다. 정말로 무릎까지 내려오는 긴 티셔츠를 입고 거기에 허리띠를 조이면 고대 로마인들이 입던 튜닉의 형태가 된다. 고대 로마인들은 집 안에서나 잠잘 때나 똑같은 튜닉을 입되 부유층들의 경우 외출할 때는 튜닉 위에 토가를 걸쳤다. 토가는 오늘날의 재킷이나 넥타이 정도로 생각하면 되는 옷이었다. 튜닉의 소재는 모직물이었는데, 염색하지 않은 모직물은 짙은 베이지색으로 얼룩이나 먼지를 가리기 적당한 색상이기도 했다. 고대 로마가 이집트를 정복한 이후에는 이집트에서 생산된 아마천이 보급되었다. 아마천으로 만든 튜닉은 여름 의상으로 활용되었다.

고대 로마 여성들은 스톨라(Stola)라고 부르는 튜닉과 유사하되 발 바로 위까지 덮을 정도로 더 긴 옷을 입었다. 이 옷은 고대 그리스 여성들이 입던 옷인 키톤 및 중동 지역 여성들이 입던 옷과도 유사한 형태였다. 스톨라가 중동의 여성 옷과 다른 점이 있다면, 허리띠를 두 개를 사용하여 허리 이외에 가슴 바로 아래의 흉부도 감싸면서 몸매를 강조하는 데 있었다. 로마의 부유층 남성들이 토가를 입은 것과 같은 맥락에서 부유층 여성들은 외출할 때 따로 팔라(Pala)라는 숄을 우아하게 주름이 지도록 해서 거쳐 입었다. 로마 시대에도 역시 여성용 의복은 훨씬 더 색상이 다양하고 대개는 그 위에 수를 놓았다.

로마 제국 초창기에는 귀부인들이 대개 조각상이나 동전에 나온 황후들의 헤어스타일을 모방하는 문화가 있었다. 특히 트라야누스 제위 시절 폼페이아 플로티나 황후의 헤어스타일은 제국 전역에서 머리를 다듬을 시간이 있는 부유층들 사이에서 유행하였다고 한다. 다른 나라 같으면 일개 시민이 함부로 황후의 헤어스타일을 모방하면 큰일 날 일이었겠지만 서기 3세기 이전까지는 권위주의가 비교적 약한 편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로마 제국에서 본격적으로 일반 신민들이 황실의 의복을 모방하여 입는 행위가 극형으로 다스려지기 시작한 것은 4세기 콘스탄티우스 2세 제위 시절부터이다.

이렇듯 고대에는 각기 지역의 환경과 생활 습관을 반영한 패션이 대부분이었으나, 권력층들 사이에서는 부와 권위를 드러낼 목적으로 다양한 의복들이 발전하였다. 그러나 고대부터 중세까지 일반인 기준으로는 기초적인 의식주를 해결하는 수준에 밖에 이르지 못했다. 일례로 우리나라만 해도 화폐가 민간에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이전에는 삼베나 무명 옷감을 화폐 대용으로 활용하였는데, 이는 옷감으로 활용할 목화나 삼베를 재배하는 것도 일이지만 목화나 삼베를 손으로 가공해서 옷감으로 만드는 일에 엄청난 양의 노동력이 소모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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