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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예술 분류법 : 제7의 예술(le septième art) - 영화

by 헌찬 2024. 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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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예술 분류법에 따르면 제 7의 예술은 '영화'이다.

영화(映畵 / Film)란 일정한 의미를 가지고 활동하는 대상을 촬영하여 프로젝터(영사기)로 영사막에 재현시키는 종합 매체를 뜻한다. 

영화의 범위는 다음과 같다. 

영화는 과거에는 활동사진(motion picture)이라고 불렸다.

현재 통용되는 의미는 아니지만 넓은 의미의 영화는 프로젝터로 트는 영상매체를 모두 포함한다. 따라서 광의의 영화에는 극장판, 드라마와 애니메이션, 그리고 극장 상영되는 다큐멘터리 또한 모두 포함된다. 바꿔 말하자면 영사기 대신 전파로만 방영되거나 혹은 인터넷으로 보급되는 일반 동영상 같은 것은 영화와 확연히 구분된다는 것이다. 물론 처음부터 영사기로 틀 의도를 가지고 제작한 작품은 어떤 매체에서든지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포르노는 영화지만 AV(영상물)는 동영상이다.)

깊게 들어가면 여러 의미가 마구 혼용되어 사용되므로 상위개념부터 명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최상위 포괄단어로는 영상(映像: 비칠 영, 모양 상)으로 빛을 담아낸 모든 것을 의미한다. 그 아래단어로는 정지영상(사진)과 동영상(활동사진)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이 동영상이 우리가 알고 있는 영화이다. 영화(映畫)에서 '화'가 뜻하는 바가 동작성이다. 그리고 그 하위로 극영화(허구)와 다큐멘터리영화(사실)가 있다. 극영화의 하위로는 실사극영화, 만화극영화로 나뉘고, 매체로서 나누면 TV극영화(드라마), 극장극영화 따위로 나누기도 한다. 흔히 일반인이 얘기하는 개념을 따지자면 영화는 실사극장극영화, 영상은 이러한 실사극장극영화를 제외한 모든 동영상을 의미한다. CF(Commercial Film)를 한국어로 직역하면 상업영화가 되지만 아무도 그렇게 사용하지 않고 광고영상이라고 한다.

상업영화는 말 그대로 '돈을 받고 영화를 보여주는 행위를 뜻한다. 엄밀히 말하면 예술작품으로서의 영화는 이전에도 있었다. 1895년 12월 28일 뤼미에르 형제가 제작한 단편 영화 모음집이다. 독일의 스클라다노프스키 형제가 만든 비오스코프로 만든 영화가 대중에게 상영한 날짜는 뤼미에르 형제보다 58일 앞선다. 그러나 큰 인기를 끌지못해 세계최초라는 명예는 가지진 못했다. 

원래 영화는 단순히 사물의 움직임을 보여주는게 목적이었다. 그러던 중 1902-1908년까지 에드윈 포터나 조르주 멜리에스를 시작으로 스토리가 담긴 영화가 출현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전에도 연극을 처음부터 끝까지 그대로 고정카메라로 녹화하여 스토리가 있는 영상은 꽤 있었지만, 조르주나 에드윈은 영상의 편집기법이라는 영화만이 가능한 기법을 발명해 영화를 단순히 사물의 움직임을 보여주는 것을 넘어서 하나의 예술장르로 정착시킨다. 에드윈 포터는 노동자 출신으로, 영화는 물론 기초적인 예술교육도 받지 못했는데 바로 이러한 점이 오히려 그가 극영화를 개발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우연히 토마스 에디슨이 운영하는 회사에 입사해 기회를 받은 게 엄청난 나비효과를 불러왔다. 조르주 멜리아스의 《달 세계 여행》이 최초의 극영화라고 흔히 알고들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그 이전에도 조르주 멜리에스는 내러티브를 포함한 영화를 많이 만들었다. 다만 《달 세계 여행》이 그의 영화 중 가장 유명하므로 생긴 착각이라고 볼 수 있다. 세계 최초의 극영화는 뤼미에르 형제의 이다.

처음의 무성영화는 중간중간에 간극을 넣고 자막을 사용했다. 이후 변사를 활용하거나 녹음한 음원을 동시에 재생하는 방식으로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으려는 노력을 보여주었다. 

한국의 영화 도입은 개화기 시절 사진과 함께 도입되었다. 당시에는 움직이는 사진이라고 해서 활동사진으로 불렸으며 들어온 시기는 1903년 이전으로 추정된다.

항공기 기내 영화 등장
항공산업이 점차 발달하면서 여러 가지 서비스가 추가되기 시작했는데, 1925년 영국 임피리얼 항공사(Imperial Airways)가 사상 처음으로 비행 중에 항공기 안에서 영화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이때 처음 상영됐던 영화가 《잃어버린 세계》(The Lost World)로 이 역시 무성영화이며, 영상 외에 자막과 배경음악으로 구성된 영화였다.

사실 영화 극초기부터 유성영화는 존재했다. 바로 토머스 에디슨의 키네토스코프와 축음기를 합친 키네토폰이다. 그 이후에도 유성영화를 위해 수많은 기술이 개발되었다. 하지만 싱크 문제와 소리를 증폭시킬 수 있는 기술이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 망하고 말았다. 하지만 증폭 문제는 1906년에 오디온 튜브의 개발로 해결되고, 1919년에 독일에서 Tri-Ergon이라는 방식이 발명된다. 소리 신호를 빛 신호로 바꾸어 필름 구석에 기록하는 방식으로, 싱크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해 낸다. 1927년, 워너 브라더스는 영화 제작사였던 비타그래프 스튜디오를 합병하여 비타폰이라는 사운드 시스템을 개발해 최초의 유성 극영화 《재즈 싱어》를 제작한다. 《재즈 싱어》는 그 해 350만 달러의 흥행을 기록하며 본격적으로 유성영화 성공의 신호탄을 울리게 된다. 그런데도 초기 할리우드 관계자는 유성영화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는데, 초기 유성영화는 음향의 질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배우들이 별로 말하지 않았고, 말하더라도 소리가 왜곡되는 게 일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재즈 싱어》가 개봉하고 2년 만인 1929년에 제작된 영화의 75%가 유성영화로 제작되면서 무성영화의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된다. 무성영화를 고집하던 대표적인 스타로는 찰리 채플린을 꼽을 수 있다.

무성영화 시대의 슈퍼스타들은 영상으로만 보기엔 멀쩡해 보여도 실제로는 목소리와 생김새의 부조화가 있기도 하고, 발음을 제대로 못 한다거나, 사투리를 쓴다거나 하는 등의 여러 문제가 있었다. 그래도 무성영화 시대에는 대사 없이 연기만 하면 됐으므로 연기만 적당히 잘하면 큰 성공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최초의 유성영화 재즈 싱어의 등장으로 인해 관객들이 배우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는 시대가 열리자 당시 배우계에는 엄청난 파동을 불러일으켰고, 생긴 것과 안 어울리게 투박하거나 경박한 목소리를 지녔던 배우들은 제아무리 슈퍼스타라 할 지라도 첫 유성영화 데뷔에서 수많은 관객의 웃음을 자아내어 망신당하게 된다.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넘어가는 이 과도기에 성공적으로 유성영화에 적응하지 못한 수많은 배우가 유명인 무명인 가릴 것 없이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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